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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절 총무처장관·감사원장 이석제...

朴昌鎬 2011. 3. 18. 20:36
 

"권력 남용 혐오한 진정한 실력자"
가난했지만 평생 청렴… 행정·법 제도 대폭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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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새벽. 혁명군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자 헌병들이 사격에 나섰다. 이석제 중령은 박정희 소장 곁에 있었다. "각하, 일이 잘 안되면 각하 바로 옆 말뚝(비석)은 제 것입니다."

1975년 월남 패망 후 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오면서 안보가 불안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석제 감사원장에게 한 시간이나 대응 전략을 설명했다. "각하 설명을 들어도 안심이 안 됩니다." "이봐, 문제 생기면 나하고 서울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되잖아." "감사합니다. 기꺼이 죽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4~6대 감사원장과 국회의원(유정회)을 지낸 이석제(李錫濟·86)씨가 2월 28일 오후 10시 55분 별세했다. 평북 신의주 태생으로 영남대를 나와 육군대 교관 시절 5·16혁명에 참여, 최고회의 법사위원장과 첫 총무처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육사 특별8기인 그는 6·25 참전 후 연대장과 육군대학 교관을 지냈다. 하지만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 생활은 비참했다. 그는 "군대 월급으로 네 식구가 보름 정도 버티면 다행이었다"고 했다. 이 중령은 '목숨 걸고 나라 지키는 장교를 먹이지도 못하는 군에 더 이상 충성 바칠 생각이 없다'면서 고시공부를 시작했고 한편으론 혁명을 꿈꾸었다. 김종필씨 소개로 대구로 가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만났다.

'"각하가 저희를 거부하면 동지들을 규합해 끝까지 해볼 작정입니다." 먼동이 틀 때까지 박 장군은 바위처럼 침묵하였다.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나서려는 순간, 박 장군이 나를 불렀다. "이 중령!" "예" "우리 혁명합시다"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이석제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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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혁명 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에 임명됐다. 대법원·법무부·검찰·혁명재판소·혁명검찰부·내각사무처를 관할하며 법령을 정비했다. 정부는 총독부 시절 법과 군정 때 만든 영어로 된 법을 번역도 않고 쓰고 있었다. 수천 건의 법령이 만들어졌다. 사법 사상 가장 중요한 개혁이었다.

1963년 제3공화국 출범 때는 총무처 장관에 임명됐다. "국가의 3대 지주가 군대·공무원·기업인데, 이 중 공무원을 맡아 정권이 바뀌어도 헌신적으로 일하도록 근간을 정비해달라"는 대통령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후 6년의 총무처 장관과 5년의 감사원장을 거치며 능률적이고 애국심 있는 공무원상을 세우고 기강을 확립한 점을 최고 업적으로 꼽는 이가 많다. 정원제도와 공정한 시험, 처우개선과 연금제도 확대가 이때 이뤄졌다. 1994년 '월간조선'은 각 부처 간부들을 대상으로 '역대 최고 장관'을 뽑았다. 감사원에서는 이석제씨가 '최고'였다.

하지만 노년은 힘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이희영(77) 전 천안시장은 "평생 이재에 관심 가진 적 없이 5남매를 키우느라 노년은 빈궁했다"며 "시력·청력 저하와 골절로도 고생이 심했다"고 전했다. 한 언론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청빈이란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다. 권력을 잡고도 특권과 부패를 증오했다. 퇴직 후 사생활도 깨끗하고 질박했다. 언론이나 대중으로부터 과소평가 받았지만 혁명세력 안에선 '박정희 시대의 진짜 핵심'이란 말을 들었다. 권력 남용이 아니라, 권력 활용의 면에서 이 시대의 실력자였다."



P 朴昌鎬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