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에게 길을 묻다] <상> "생명 불태운 열정의 경영자"
마지막 순간까지 일선에서…
■ 잭 웰치 前GE회장이 말하는 '호암의 삶'
호암 보면 '한국경제의 기적' 이해할 수 있어
반도체산업 진출등 과감한 결단·의욕 돋보여
■ 잭 웰치 前GE회장이 말하는 '호암의 삶'
호암 보면 '한국경제의 기적' 이해할 수 있어
반도체산업 진출등 과감한 결단·의욕 돋보여
이종배기자 ljb@sed.co.kr
20세기의 최고경영자로 꼽히는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
그는 호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합작 등 사업 문제로 수 차례 만났고, 특히 호암이 타계하기 한달 전에는 서울을 찾아 직접 면담한 '유명 인사'이기도 하다.
25세 적은 나이, 판이하게 다른 동서양의 기업문화 등 세월과 문화의 벽이 있지만 웰치에게 호암은 '성공한 기업인 그 이상'이었다. 웰치가 본 호암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웰치는 "호암을 보고 나서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경제의 놀라운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특히 기술개발에 놀라운 관심을 보여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호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합작 등 사업 문제로 수 차례 만났고, 특히 호암이 타계하기 한달 전에는 서울을 찾아 직접 면담한 '유명 인사'이기도 하다.
25세 적은 나이, 판이하게 다른 동서양의 기업문화 등 세월과 문화의 벽이 있지만 웰치에게 호암은 '성공한 기업인 그 이상'이었다. 웰치가 본 호암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웰치는 "호암을 보고 나서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경제의 놀라운 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특히 기술개발에 놀라운 관심을 보여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 호암의 일생은 한국경제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 191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26세에 '협동정미소'를 열고 28세에는 현 삼성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그 뒤 제당ㆍ면직ㆍ비료 등에서 TVㆍ반도체 등 최첨단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한국경제가 단순 부품조립에서 중화학ㆍ전자ㆍ반도체 등 첨단산업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도 호암의 결단과 의지 때문이었다.
호암은 196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전자산업이 미래라며 설득, 1968년 정부의 '전자공업진흥 8개년 기본계획'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국경제의 거목 호암이 50 여년간 삼성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회사 설립과 인수를 통해 일군 기업만도 37개에 이른다.
특히 1982년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한국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와 호암의 기술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호암은 평소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잊어본 적이 없다. 기술보국이라는 경영철학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웰치는 호암을 "대단한 의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어서 진취적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는) 노년에도 젊은이보다 더한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굳이 웰치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는 실패를 통해 신기원을 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호암은 10여년간을 실업자 신세로 지냈다. 회고록에서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기상을 잃지 않았다.
첫 사업이었던 협동정미소와 운수사업은 중일전쟁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호암은 실패 앞에서도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훌훌 털어버렸다. 그 뒤 부정축재자, 주식헌납 등 여러 어려운 일이 있지만 호암은 절대 고난에 무릎을 끓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 진출은 호암이 칠순을 넘은 나이에 내린 결단이다. 또한 1976년 위암 진단을 받고 병마를 이겨내며 이룬 성과다.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다'는 웰치의 평가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호암에 대한 웰치의 회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호암이 경영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웰치는 "호암을 만나는 동안 그와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호암은 내가 생각하는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고루 갖춘 경영자였다"고 말했다.
호암의 기업관은 지금도 살아 있다. 호암은 "기업의 적자는 한 기업의 적자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사회악(惡)"이라고 했다. 또 "기업 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생계를 보장해주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웰치는 호암을 처음 봤을 때 진취적 의욕에 불타던 낮은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호암의 나지막한 말에 귀를 기울인 자신이 그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서술했다.
호암은 한평생 '논어'를 즐겨 읽었다. 왜냐하면 경영기술보다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웰치는 추모의 글을 "진짜 경영자라면 호암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일선에서 마지막 생명까지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끝맺었다.
한국경제가 단순 부품조립에서 중화학ㆍ전자ㆍ반도체 등 첨단산업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도 호암의 결단과 의지 때문이었다.
호암은 196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전자산업이 미래라며 설득, 1968년 정부의 '전자공업진흥 8개년 기본계획'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국경제의 거목 호암이 50 여년간 삼성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회사 설립과 인수를 통해 일군 기업만도 37개에 이른다.
특히 1982년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한국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와 호암의 기술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호암은 평소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잊어본 적이 없다. 기술보국이라는 경영철학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웰치는 호암을 "대단한 의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어서 진취적이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는) 노년에도 젊은이보다 더한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굳이 웰치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는 실패를 통해 신기원을 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호암은 10여년간을 실업자 신세로 지냈다. 회고록에서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기상을 잃지 않았다.
첫 사업이었던 협동정미소와 운수사업은 중일전쟁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호암은 실패 앞에서도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훌훌 털어버렸다. 그 뒤 부정축재자, 주식헌납 등 여러 어려운 일이 있지만 호암은 절대 고난에 무릎을 끓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 진출은 호암이 칠순을 넘은 나이에 내린 결단이다. 또한 1976년 위암 진단을 받고 병마를 이겨내며 이룬 성과다.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다'는 웰치의 평가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호암에 대한 웰치의 회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호암이 경영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웰치는 "호암을 만나는 동안 그와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호암은 내가 생각하는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고루 갖춘 경영자였다"고 말했다.
호암의 기업관은 지금도 살아 있다. 호암은 "기업의 적자는 한 기업의 적자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사회악(惡)"이라고 했다. 또 "기업 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생계를 보장해주고 세금을 납부해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웰치는 호암을 처음 봤을 때 진취적 의욕에 불타던 낮은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호암의 나지막한 말에 귀를 기울인 자신이 그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서술했다.
호암은 한평생 '논어'를 즐겨 읽었다. 왜냐하면 경영기술보다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웰치는 추모의 글을 "진짜 경영자라면 호암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경영일선에서 마지막 생명까지 불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끝맺었다.
"삼성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 국가가 더 부흥하면 산업은 저절로 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광복 후 30여개의 큰 회사가 망하지 않고 잘 있었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더 잘되지 않았겠는가." (1983년 12월 비서실 회의) "자기만 잘살아보겠다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국가와 사회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기업이 있다. 기업을 부실하게 만들어 국민경제에 피해를 주는 사람은 기업인의 자격이 없다." (1980년 8월 서울경제신문 인터뷰) "좁은 국내에서 첫째 둘째를 겨룬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세계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꿈이다." (1980년 7월 전경련 강연)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참다운 기업인은 거시적 안목으로 기업을 발전시키고 국부 형성에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기업정신이다." (1976년 4월 서울경제신문 기고) "기업의 규모가 크든 작든 사람은 신뢰 받고 있을 때 가장 높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아무리 규모가 큰 회사라도 상호신뢰의 인간관계가 뒷받침돼 있으면 그 회사는 거대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976년 서울경제신문 기고) "삼성이 '인재의 보고' 라는 말을 세간에서 자주 하는데 나에게 이 이상 즐거운 일은 없다. 우수한 인재야말로 기업의 번영을 좌우한다." (1982년 4월 보스턴대 박사학위 수여식) "회사의 보존과 발전은 창업자가 아닌 경영을 맡은 경영자가 전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해나가야 한다. 그동안 누차 강조했으나 충분히 이행되지 않고 있다." (1972년 사장단회의) "일상사는 크든 작든 판단의 연속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시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판단력이다." (1977년 1월 신년사) "진정한 리더십은 영속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가의 리더십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리더십의 성격이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해야만 한다." (1980년 리더스지 기고) "경영이란 새로 집을 짓거나 길을 닦으려고 할 때 미리 해놓은 측량계획의 뜻이나 다름 없다." (1976년 서울경제신문 기고)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기업의 여건을 잘못 판단하거나 기회를 잘못 타면 아무 소용이 없다. 10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3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시운을 잘 타고 못 타는 것도 결국 능력에 달려 있다." (1976년 서울경제신문 기고) "제2의 도약을 위해서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반도체 개발경쟁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결단이었다." (1985년 방송대담) "정보라고 하는 것은 기업경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수단이다. 기업경영은 혼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정보까지 알아야 할 것이다." (1983년 사장단회의) "우리 삼성인은 세계를 한눈에 굽어보는 넓은 시야와 패기를 가지고 세계무대를 누벼야 한다. 삼성의 깃발이 드높게 휘날리게 되기를 기대한다." (1977년 신년사) "문화는 그것이 창조되고 수용돼 궁극적으로는 모든 국민의 것이 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풍요롭게 가꾸어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시대야말로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가 될 것이다."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기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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