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애송하는 詩

삼성 `이병철 DNA` 100년

朴昌鎬 2010. 1. 4. 14:13

  `이병철 DNA` 100년

                               송 의 달

 

  연말 연초가 되면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는

하루 평균 1000여 명의 인파가 몰리는 명소가 된다. 2007년 11월 호암 타계 20쥐에 맞춰 일반

인들에게 생가를 개방한 후, `큰 돈을 벌거나 성공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품고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작년 말 까지 생가를 다녀간 방문객만 16만명이 넘는다.

  많은 사람들은 2010년이 `한일(韓日)합방에 의한 망국(亡國) 100년` 이란 정치적 의미에 주목한다. 망국 후 100년 동안 나라를 되찾고 선진국 문턱에까지 이른 아픔과 극복의 역사를 토대로 이제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 나가자는 각오를 다진다. 하지만 지난 100년을 가는하게 했던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있다. 호암 이병철이 다음달로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와 운명을 같이한 그는 1938년, 단돈 3만원으로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

성상회`를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대한민국 제1호` 기록은 여럿이다.

  공채 방식 사원 최초 모집, 가장 먼저 비서실 설치, 민간 차관 1호기업 출범, 종합상사 최초

설립,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기업 연수원 운영...... 80년대 초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진두지휘, 작년 초 현재 대한민국 총수출의19%,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23%를 차지하는 `글로벌 삼성`

의 초석을 놓았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둡고 그늘진 부분도 일부 있었지만,

호암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전례럾이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엔 이의가 별로 없다.

  이런 호암의 성공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비결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상상을 초월한 철저

한 연구와 조사이다. 그는 삼성상회 창업에 앞서 사업 품목과 경영전략 수립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 평양, 신의주, 흥남은 물론 중국 창춘, 선양을 거쳐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까지 2개월동

안 조사여행을 했다. 완벽을 지향하는 이런 습관은 반도체와 조선 산업, 호텔 같은 신규 사업에 진출 할 때마다 세계 최고의 사례연구와 전문가 면담, 최신 자료 섭렵 등으로 이어졌다.

  둘째는 물러서지않는 용기와 긍정적 사고이다. 호암 역시 한국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가 망하

고, 사카린 밀수파동 등으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등 쓰라린 시련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능력과 한계를 지키며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한다` 는 각오 아래 좌절하지 않고 새 사업에 뛰어드는 패기를 보였다.

  "성공한 한국인의 공통점은 `자기 긍정고`과 `성취 열정` 인데, 이병철은 이런 요소가 특히 강

했다" (백기복 국민대 교수)는 것이다.

  마지막은 부단한 자기 각성의 자세다. 호암은 20초반과 30대에 무위도식과 연락(宴樂)에 빠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 사업에의 꿈과 의지를 단련했다. 이미 30대에 평생 먹고살

만한 부를 모은 그는 "독립국가 한국의 기업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문제의식 아래 숱한

도전을 시도했다. 수원 삼성전자 홍보관에 게시돼 있는 그의 마지막 메세지는 이렇다.

  "삼성은 나라의 기업이다. 부디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에 이로운 방향으로 삼성을 이끌어

다오."

  요약하자면 정경 유착 논란 같은 일부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 호암에 대한 추모와 학습 열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은 뼈를 깎는 노력과 수양을 바탕으로 한 `이병철 DNA`가 살아 숨쉬고 있

기 때문일 것이다. 글로벌 경제 전쟁과 경쟁의 파고가 한층 높아지는 경인년 새해에 성공과 부

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되새겨 봄 직한 준칙이지 않을까.

 

[출 처] 조선일보 2010.01.04



P 착한선비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